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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과의 대화록에 앞서
대화에 함께한 서정은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21학번 재학생입니다.
이 웹의 운영자 유경과는 2022년 1학기 판화과 수업에서 만났습니다.
고민이 가득했던 학기 중반에 서서, 어쩐지 고민에 유연하게 대처할 것 같던 서정을 떠올리며 대화를 청했습니다.
함께 저녁을 든 인터뷰 이후로 조금은 느슨히 연결되었을까요?
이 대화록의 바탕에는 고민이 자리합니다.
유경: 요즘 서정이 가진 고민은 무엇인가요?

서정: 저는 고민이라고 하면 작업적인 고민을 먼저 생각했어요. 최근에 하게 된 고민인데 교수님께도 여쭤봤지만 아직 해답은 안 나온 상태인데 이 얘길 공유해 볼게요. 제 평소 작업 가치관을 먼저 얘기하자면 저는 조금 직관적인 그림을 좋아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대비도 좀 센 것 같아요. 관람객이 봤을 때 무슨 얘기를 하는지 바로 알아듣는 그런 그림이 좋아요. 그래서 그런 그림 위주로 그리려고 하고 있었죠. 그런데 생각보다 벽이 있는 거예요. 이런 저런 활동하면서 받은 피드백 중에 공통적인 말이 "설명적이다."라는 거예요. 직관적인 건 좋은데 설명적이라서 플러스알파가 없는 느낌이라는 거죠. 그래서 이제 뭐든 좀 매력적이려면 적당한 의미와 적당한 숨김을 통해서 그 이상을 연상하게 해야 하나 고민해요. 줄다리기를 하는 것 같아요. 얼마나 보여주고 얼마나 숨길지.

유경: 작업적인 고민 외에 평소 살아가면서 하는 고민은 어떤가요?

서정: 학교 생활을 하다 보니까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좀 많은 것 같아요. 다양한 걸 할 기회가 자꾸 오잖아요. 일례로 검도도 그렇고요. 학교 수업 외에도 욕심내고 싶은 것들이 늘어나다 보니까 밸런스를 맞춰야겠더라고요. 근데 제가 항상 그게 잘 안 돼요. 제가 하고 싶은 게 많은 편인데,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하나에 많이 투자를 하면 그만큼 다른 걸 뺏기는 거예요. 그게 항상 고민이에요.

유경: 졸업 후의 고민이 있나요?

서정: 아무래도 순수과다 보니까 아직까지는 전업 작가를 하고 싶거든요. 졸업 이후에 계속 안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고민이 돼요. 순수과는 수입벌이로 학원 선생님 아니면 디자인 툴을 배워서 디자인 이런 식을 가더라고요. 그래서 저희 과에서 복수 전공으로 디자인을 하는 친구들이 꽤 있고요. 저도 복수 전공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데 항상 그런 의문이 들어요. 디자인을 정말 좋아해서, 뜻이 있어서 전공을 하는 친구들이랑 이걸 살아날 구멍처럼 생각하고 디자인을 배우는 게 마음가짐의 차이가 있지 않을까. 또 진심을 다한 경쟁력이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일단 이번 학기에 본전공 다 들어보면서 제 전공에만 집중하고 있어요.

유경: 이번주가 동양화과 졸업전시 주간이라고 알고 있어요. 서정은 졸업전시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점이 있나요?

서정: 2학년이라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상태는 아니고 앞으로 주어진 시간동안 더 많이 시도하고 연구해야지 싶어요. 고민 중입니다!

유경: 기억에 남는 고민을 소개해줄 수 있나요?

서정: 이 질문은 제가 예전에 냈던 글쓰기 과제가 설명이 잘 될 것 같아서 그걸로 답을 대신할게요.

기운생동은 묘사되는 대상의 기운이 화면에 생생하다는 의미로, 동양화에서는 기운생동한 그림을 으뜸으로 삼는다. 한 예로 윤두서의 초상화에서는 그림 속 눈동자가 살아있는 듯 이글이글하고, 수염 한 올 한 올의 묘사에서 강한 기백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기운생동한 그림에서는 생기 있는 힘이 느껴진다.

나는 기운생동한 그림이 S가 그린 그림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S의 그림은 기운이 넘쳤다. S는 종이 앞에서 망설이지 않았고 휘두르는 붓에는 강한 힘이 실려있었다. 그것들은 한데 모여 묵직한 그림을 만들어냈다. 무게감 있는 그림은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붓질이 뒤엉켜 마치 추상화처럼 느껴졌다. 그 애의 그림은 그렇게 반짝반짝 빛이 났다. 빛나는 그림은 S를 환하게 했고 나는 그런 S를 동경했다. 그러나 빛이 있는 자리에는 그림자도 존재하듯이, S를 동경하는 내 마음에는 질투의 감정도 섞여 있었다.

오랜 기간 입시를 하면서 나는 실패하지 않는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그림에서의 실패는 곧 입시의 실패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이 존재하지 않는 분야가 예술이라는데, 나는 그 안에서 답을 찾아내려 했다. 실기에서 계속 떨어지는 내 그림이 오답처럼 느껴졌다. 내 그림에는 힘이 부족한 경향이 있었는데, 이를 약점이라고 생각했다. 의식적으로 선을 진하고 강하게 사용해 보았지만, 극단적인 선은 그림을 딱딱하게 만들 뿐이었다. 스스로 확신이 없어서인지 그림을 그릴수록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었다. 마치 뿌연 안갯속을 계속해서 걷는 느낌이었다. 틀려서는 안 된다는 강박 때문이었을까? 내 그림은 기운생동하지 않았다.

반면 S의 그림은 이런 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힘 있는 붓 터치와 크고 작은 묘사들이 그림 안에서 한데 어우러져 생생함을 만들어냈다. 몇 번 S를 상상하며 흉내 내듯 그림을 그려보기도 했지만, 조절 없는 힘 때문에 결과물은 오히려 투박했다. S를 따라 할 수는 없다고 느꼈을 때 마음 한구석 가졌던 질투의 감정도 사라졌다. 나는 S의 그림을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에 S 마저 좋아할 수밖에는 없었다. S의 그림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결국, 나는 S가 그리는 그림은 그만이 할 수 있는 것임을 인정했다. 동시에 그림에 대한 욕구가 이전과는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림이 좋아서 시작했던 처음과 달리 타인의 틀에 스스로를 맞추려 하고 있었다. 순수한 감정은 그렇게 변질되어 있었다. 반면 S는 자신감이 있었고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나 또한 나의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S의 유일함을 인정한 순간에서야 나는 내게 집중할 수 있었다. 내 그림은 힘이 약했지만 부드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유연함과 세밀함이 나의 장점이었다. 누군가처럼 잘 그려야 한다는 생각을 버린 후 비로소 나다움을 찾아낼 수 있었다. 타인의 틀에서 벗어나 자신을 직시할 때 진짜 생동하는 기운이 나온다. 기운생동함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먹의 진함이나 힘이 강하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부드러움에서도 기운생동은 나올 수 있다. 나다움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나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유경: 위에 소개해준 기억에 남는 고민에 대한 답을 지금은 찾았나요?

서정: 당시 저는 스스로 답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창작이란 분야는 그렇게 쉽게 완결 지어지지 않더라고요. 여전히 제 작업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고민하고 있지만 과거의 제가 그랬던 것보다는 훨씬 스스로를 믿게 된 것 같아요!

유경: 저는 요즘 인간관계가 가장 고민이에요. 서정도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을 하나요?

서정: 고등학생 때부터 쭉 미술을 해왔기 때문에 제 주변에는 미술을 전공으로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만나는 사람들의 폭이 좁다고 생각해서 보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시선을 공유받고 싶다는 고민이 있었어요. 지금으로선 코로나가 완화되고 비대면 수업과 동아리 등을 통해 다양한 분야의 친구들을 많이 만나게 되면서 이 고민이 어느 정도 해소된 것 같아요.

유경: 인터뷰하며 느끼는 건데, 서정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관계를 이어가는데 능숙할 것 같아요. 사람들과 이어지고 그 관계를 이어갈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 있나요?

서정: 저한테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하고 궁금해하는 면이 있는데 이게 제가 사람들과 관계를 이어 나갈 때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함부로 이것저것 질문하기보다는 그 사람과의 선 안에서 그를 궁금해하는 것. 선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유경: 고민 얘기만 계속하다 보니 슬슬 쉬어가는 가벼운 질문으로 마무리를 해볼까 해요. 이 대화록을 공유받을 ‘피지컬 워크솝(2)’ 수업의 학우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점심 메뉴 혹은 식당이 있나요?

서정: 우리가 못 갔던 식당 '아티장 깔조네버거'! 빵이 치아바타로 되어있는 게 특색 있고 맛있어요. 건강하고 담백한 맛. 사장님도 친절하시고 무엇보다 학교랑 가까워요.

유경: 이번 겨울방학에는 어떤 계획이 있나요?

서정: 학기 중에 시도하지 못한 공부나 운동! 길게 여행을 다녀오고 싶기도 해요!

[대화] Nov 16th 2022 Wed
[업데이트] Dec 27th 2022 Tue